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주당계 정당 (문단 편집) ==== [[신민당(1967년)]] ==== * 1967년 2월 7일 ~ 1980년 10월 27일 ([[5.17 내란]]으로 강제해산) 신민당은 [[제6대 대통령 선거]]를 앞두고 [[민중당(1965년)|민중당]], [[신한당]] 양당이 야권 단일화를 위해 합당하여 탄생한 정당이다. 6대 대선에는 지난 대선에 이어 [[윤보선]]이 출마했지만 박정희 정부의 [[경제계획/대한민국|경제 개발 5개년 계획]] 성공으로 인해 4년 전보다 훨씬 큰 격차로 패배했다.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민당의 대중적 이미지는 그냥 '''무늬만 다르지 형태는 똑같은 보수야당''' 내지 '''기성 정치인들이 모인 구태정당'''에 가까웠다. 그러나 1971년 [[제7대 대통령 선거]]를 앞두고 40대였던 [[김영삼]], [[김대중]], [[이철승]]이 출마를 선언하며 분위기가 달라진다. 일명 [[40대 기수론]]에 [[꼰대]] 마인드의 지도부는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지지자들은 환호했고, 최초로 현대식 공개경선을 실시한 결과 김대중이 승리하여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. 김대중은 [[3선 개헌]]까지 저지른 [[박정희]]가 이번에도 대통령이 되면 '''영구집권의 총통제를 실시할 것'''이라고 유권자들에게 경고했지만, 결국 패하고 말았다. 이후 김대중의 예언, 그리고 [[훼이크|앞으로는 표달라 하지 않겠다던]] [[박정희]]의 말대로 정부는 [[10월 유신]]을 선포했고, 신민당은 제1야당으로서 유신독재에 맞서 다양한 방식의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다. 이때부터 신민당을 비롯한 민주당계 정당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 평가가 희석되고 '''민주화 투사 정당'''이라는 이미지가 자리잡게 된 것이기 때문에 혹자는 구 [[민주당(1955년)|민주당]]보다 신민당을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로 쳐주기도 한다. 이후 장기화된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적 불만과 피로가 누적되며 [[제10대 국회의원 선거]]에서는 신민당이 [[민주공화당]]의 정당 득표율을 앞서는 이변을 연출했고, 그해 [[10.26 사건]]으로 유신 정권은 종말을 맞이한다. 박정희 사후 신민당과 민주공화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민주헌법 개헌안에 합의했지만 신군부가 [[5.17 내란]]으로 정권을 잡으며 민주화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. 한편 40대 기수론을 타고 정치권 전면으로 급부상했던 [[양김]] 중 [[김대중]]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해외 망명 투쟁을 벌이던 중 [[박정희]] 정권에게 [[김대중 납치 사건|납치/감금당하는]] 고초를 겪어야 했다. 반면 국내 투쟁을 진행했던 [[김영삼]]은 총재로 선출되어 당을 이끌었으나, 당내 권력다툼에서 밀리고 있던 정적 [[이철승]]이 [[차지철]]을 비롯한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고 [[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]]을 일으키며 반강제로 이철승에게 당권을 넘기게 된다. 하지만 김영삼은 1979년 전당대회에서 강경 노선을 앞세우며 다시 이철승을 꺾고 기어코 총재직을 탈환했다. 박정희 정부는 [[YH 사건]] 탄압, [[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]], [[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]] 등을 통해 김영삼을 어떻게든 정치권에서 제거하려 했지만 분노한 국민들이 [[부마민주항쟁]]을 일으켰다. 이 당시 남긴 희대의 명언이 바로 '''[[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]]'''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